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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역사 - 인더스문명3

by 도르언니 2023. 3. 16.

언어와 문자

토판이나 문서로 쓰인 글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중 언어로 이루어진 비문 등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아직 해독은 불가능하다. 이 문자는 수메르어, 엘람어, 미노스 문자, 히타이트어 등 동시대 다른 고대 언어와 유사성이 없고, 산스크리트어 등 후대의 언어와도 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자의 숫자는 250~400자 정도이다. 하지만, 인장에 새겨진 수많은 상형문자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문자를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문화

술을 만들어 먹은 흔적은 있으나, 실제로 음주 문화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죽은 후 시체를 땅에 묻는 매장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이외의 유적에서는 남녀를 합장했다.유적에서는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정교한 장식, 테라코타로 만든 토우, 석회암으로 만든 조각상, 동석(凍石)으로 만든 호부(護符), 인장, 점토 또는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신구 등이 출토됐다. 이를 만들기 위한 전문 수공예 기술이 발달했다.

토우

동물 토우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은 혹이 없는 외뿔 황소이며, 들소, 코끼리, 혹 있는 황소, 무소 등도 흔히 나타난다.[32] 인더스 사람들이 일상에서 친근히 여겼던 황소, 공작, 원숭이, , 거북 같은 것도 자주 보이는데, 거칠고 소박한 솜씨로 동물의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기가 과장되어 있는 토우도 발견되는데, 이는 남근 숭배와 관련이 있다.신상 토우는 풍요와 다산의 기원 대상으로, 유방이나 허리만 과장한 어머니 여신 부류가 많고, 눈과 코를 극단적으로 생략하고 머리의 상투나 장신구를 되는 대로 만든 데다 표정이 파충류와 흡사한 그로테스크한 것도 있다. 사제 등을 조각한 것도 있다.테라코타 토우는 신상, 동물, 완구류로 나뉘는데, 모두 점토를 손으로 반죽해서 만든 단순 소박한 모양이면서도 힘차고 늠름한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조각

하라파에서 출토된 석회암으로 만든 토르소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춤추는 소녀' 등을 보면, 양감의 파악이나 육체의 사실적 관찰에 의한 모델링의 적확한 표현 등이 현대의 조각상에 뒤지지 않는다. 왼쪽 팔에 팔찌를 한 채 나체로 춤추는 이 날씬한 소녀는 청동기 예술의 걸작으로, 인더스문명 사람들이 유희를 즐겼음을 암시한다. 소박한 솜씨의 테라코타 토우에 비해서, 석회암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은 제작자와 주문자 모두 테라코타를 애호한 평민과 이질적인 사람들로 보이며, 조형 감각이나 표현 기법은 놀랄 만큼 뛰어나다.

인장

동석으로 만든 호부(부적), 인장 등은 거기에 새겨진 인더스 문자가 아직 완벽히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용 목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부적들은 정령 숭배 또는 수목 숭배 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후대에 베다 문명 속에 서서히 파고드는 형태로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인장에는 외뿔황소, 공작, 무소, 코끼리, 보리수 등의 형상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인장들은 토테미즘 부적이나 소유권 표시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인더스 인장들은 서아시아 엘람 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우르, 키시)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두 문명이 무역을 통해 평화롭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며, 인장이 무역 관련 통행증이나 수령증 등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인더스 문명의 독창성과 섬세한 세공 기술을 보여 주는 전형적 유물이다. 한 변이 6센티미터보다 작은 크키로 만들어진 이 인장들은 2000점가량 발견되었다. 상형문자와 함께 악어, 물소, 호랑이, 코뿔소, , 코끼리 등을 정밀하게 음각했다.

토기

그 밖에 녹로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고 붉은 바탕 표면에 검은 무늬를 그린 뚜껑 달린 항아리 종류가 있는데, 이런 소성 채문 토기(燒成彩紋土器)는 이란의 채문 토기 문화와 유사한 조형, 채화 기법을 보인다.

장신구

모헨조다로에서는 점토, , 상아, 도자기,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화장품 용기들이 다수 발견됐다. 오일, 연고를 담은 용기도 있으나, 대부분은 눈꺼풀 등을 검게 칠하는 데 쓰는 가루를 담았다. 구리, 청동, 나무로 만들어진 화장 막대도 함께 발견됐다.검은빛 또는 초록빛을 띄는 원통형 부적이 조개 팔찌와 함께 여성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팔찌는 착용자의 결혼, 사회적 소속, 지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봉헌의 의미가 있으며, 밀폐된 원으로 신에게 보호 받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한편, 보석 세공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홍옥수, 청금석, 구리, 터키석 등으로 만든 구슬들을 엮어 허리, , 손목을 장식했고, 수준 높은 홍옥수 구슬 목걸이를 만들어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수출했다.

영향

인더스 문명과 갠지스 문명은 다른 문명이다. 우르두어에서 인도를 일컫는 단어인 바라트(Bharat)에서 알 수 있다. 바라트는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가리킨다. 인더스 문명과 후대의 아리아인이 건설한 베다 문명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아직 그 직접적 영향 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인더스 사람들이 호전적 유목민인 아리아인에게 무력으로 정복되었으나, 문화나 종교 측면에는 더 우월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문명의 종교를 점차 수용했으며, 이에 따라 힌두교는 아리안 요소와 비아리안 요소들 융합의 결과라는 주장이 흔히 제기된다. 오래된 인더스 문명은 멸망했지만, 새로운 문명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나티야 샤스트라같은 인도 고대의 연극 이론서에 창조신 브라흐마가 수드라 계층의 요구에 따라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다섯 번째 베다를 만들어 연극으로 공연하게 하면서 바라타와 그 아들 100명의 도움을 받아 무대에 올리게 한 것을 두고 브리스키는 아리아 문명이 비아리아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특히, 하위층의 민속 기술인 연극을 통해 이를 달성한 것은 모헨조다로, 하라파 도시 문명(인더스 문명)은 패배했으나, 패배한 것은 지배층이었고, 하위 계층 문화는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키스탄 쪽 문헌에서는 모헨조다로인들이 힌두인들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힌두(Hindu)는 인더스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신두(Sindhu)에서 나왔는데, 힌두는 신두의 페르시아어음 변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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